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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의 성희롱, 묻어둘 수 없었다"-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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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1-03 17:58 조회1,3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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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의 성희롱, 묻어둘 수 없었다"

5년전인 2011년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개소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1991년 개소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전국적인 이슈가 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지원하는데 앞장 섰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주요 성폭력 사건들과 현재 남은 과제들을 정리하고, 한국사회 성폭력 피해자들의 인권 현실을 총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나는 많은 갈등을 했다. 이 문제를 나 혼자 묻어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고발을 해 다시는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지. 집안의 반대, 친구들의 반대, 그리고 내가 정말 정면으로 부딪힐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함. 그럼에도 그때 내가 대자보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은 그냥 주저앉으면 내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거라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이 사회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는 대학에서조차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다른 어딘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어떤 직업을 얻어도 성희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할 거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성희롱과 정면대결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각오와 결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아직도 내가 넘어야 할 벽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나는 이 어둡고 추운 겨울을 보내며 그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얼어붙은 가슴에 나는 봄이 되고 싶다. 그래서 더 이상은 나처럼 춥고 외로운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 싶다."…
이 글은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제기한 A씨가 1심 재판이 진행되던 때에 썼던 '나는 이제 봄이 되고 싶다'란 제목의 글 중 일부분이다. 그 당시 이 글을 읽으면서 성희롱 피해로 인한 그녀의 고통과, 소송을 하면서 겪게 되는 현실과, 세상의 벽에 막막해 하던 그녀의 아픔이 절절히 느껴져 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A씨는 봄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녀가 봄이 되고 싶어 했던 1993년으로부터 17년이 흘렀다. 그럼 지금 그녀는 봄이 되었을까? 또 A씨처럼 성희롱 피해를 입은 수많은 이들은 봄이 되었을까?
직장내 성폭력,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은 무척이나 많은 수식어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소송사건, 국내 최초의 성희롱 승소사건, 성희롱 관련법을 제정하는 데 단초가 된 사건, 7년간의 긴 소송 사건, 용기 있는 여성이 있어서 가능했던 사건 등등.
수식어가 많은 만큼 1993년 소송을 시작하던 그 당시에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충격과 파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동안 친밀감의 표현일 뿐이라면서 행해져 왔던 성적 언동에 성희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사소하고 개인적 문제라는 이유로 사적으로 해결하라고 했던 성적 언동이 사회적인 문제로, 일할 권리를 침해하는 문제로, 법적소송이 가능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더군다나 교수가 조교를 성희롱 했을 리 없다는 항변까지 포함해서 이 사건은 우리 사회를 들썩거리게 했고 거의 모든 언론에서 전면기사로 다루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사회를 놀라게 한 이 사건은 유일한 사건이 아니라 직장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다수의 사건 중 하나였다. 1991년에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성폭력 전문상담소로 문을 연 이후 현재까지 전체 성폭력 상담의 유형별 1위는 늘 직장 내 성폭력이었다. 2010년에도 예년과 비슷한 25.1%의 피해자들이 직장 내에서의 피해를 호소해 왔다.
또한 직장여성 중에 70% 이상이 한 번 이상의 성희롱 피해를 경험하고 있다는 실태조사가 매년 발표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성희롱이 공론화되기 이전에도 많은 성희롱 피해자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자신의 피해를 알리지 않았던 것뿐이다. A씨가 "아직도 내가 넘어야 할 벽은 너무나 많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피해자의 고통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잘못된 성희롱에 대한 통념을 믿는 문화와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관대한 문화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2010상담통계 中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 2010년 성폭력 상담통계에서 나타난 피해자-가해자 관계의 84.8%는 아는 사람, 그 중 직장내 관계가 25.1%로 1위를 차지한다. 
 -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 문제를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드러낸 이 사건은 1992년 5월 A씨가 기기담당 조교로 출근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지속적인 교수의 성희롱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싹오싹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쾌감에 시달리면서도 성희롱의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교수가 조교인 자신의 실질적인 고용주였기 때문에 대항하기 힘들어 묵시적으로만 거절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던 중 전임조교가 퇴직금을 받으러 와서 교수로부터 성희롱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디를 가자고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고, 차를 같이 타지도 말라"는 조언까지 했다. 비로소 A씨는 교수가 상습적으로 성희롱을 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조교로 제안을 받았을 때 '전임조교들이 왜 이렇게 좋은 조건의 직장을 그렇게 빨리 그만두었을까?'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결국은 성희롱이 원인이었던 것이었다. 그 후로도 A씨는 계속되는 육체적, 정신적 성희롱에 견디다 못해 교수에게 태도를 분명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교수가 제안한 매일의 산책 데이트를 거절하면서 성희롱에 대한 명시적이고 뚜렷한 거부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바로 교수는 A씨에게 업무상의 불이익을 주기 시작했고 1993년 6월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A씨는 부당한 조처에 대해 해결을 바라는 진정서를 대학 본부에 보냈으나 대학 당국은 진상조사는커녕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결국 A는 1993년 8월에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는 대자보를 교내에 붙이게 되었다. 이 대자보를 본 총학생회와 대학원자치회협의회, 여성문제 동아리협의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하였고, A씨의 피해가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묵묵부답이었고, 오히려 교수는 1993년 9월에 A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성희롱 피해자이면서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A씨는 자신이 당한 성희롱 피해와 명예훼손에 대한 대응방법을 성폭력 전문상담소에 상담하면서 성희롱 관련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접한 여성단체는 뜻을 같이 하는 12개의 여성·시민단체, 서울대대학원자치회협의회, 서울대총학생회와 함께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구성하여 이 사건을 지원하게 된다.
공대위는 소송기간 동안 법정지원은 물론 성희롱의 실상을 실태조사, 토론회, 자료집 제작 등을 통해 알렸다. 또한 성희롱 관련법 제정 촉구와 항의시위, 성희롱 예방을 위한 문화제, 서명운동, 걷기대회 등 다각적인 활동을 하였다. 공대위의 회의만도 90회가 넘을 정도였다. 이 사건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는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였고 국내외에서 서명운동에 참여한 수만도 만여 명을 넘기도 했다.
가해자 그리고 학교와 국가, 7년간의 싸움이 시작되다

1993년 10월 가해자인 교수, 대리감독자로서의 감독을 소홀히 한 서울대학교, 국립대의 설치운영자로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7년간에 걸친 길고 긴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소송사건이 시작되었다. 조교의 변호는 박원순, 이종걸, 최은순 변호사가 무료 변호인단으로 무려 7년 동안 열정을 다 쏟아 이 사건을 승소로 이끄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1994년 4월 5차에 걸친 법정 공방전을 거쳐 1심 재판부는 피고 교수에 대해서만 3000만 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공대위와 여성계에서는 학교와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은 아쉬움은 있었지만 판결은 환영했다. 하지만 여전히 별일 아닌 것에 과하다는 교수 동정론도 존재했고, 판결을 한 재판부에도 격려와 비난의 전화가 교차했다고 한다.
교수는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를 하였고 A도 1심에서 인정받지 못한 대리 감독자로서의 서울대학교와 설치 운영자로서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을 묻는 항소를 하였다. 다시 10차례에 걸친 항소심 법정 공방이 있었고 1995년 7월 항소심 재판부는 원고 A씨에 대한 패소 판결을 내렸다.
공대위와 여성계는 여성운동을 50년 퇴보시킨 판결이며 판사는 즉각 사퇴하라고 성명서를 냈고, 판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법원 앞 도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서울대 학생들은 가해자 교수의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다.
1995년 8월 A씨는 상고장을 접수하였고 1998년 2월 10일 상고심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파기 환송시켰다. 실제적인 상고심에서의 승소였다. 그러나 상고심 재판부도 학교와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원심과 같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된 지 1년 4개월 만에 환송심 재판부는 교수에게 원고 A에게 5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러한 판결에 대해 A와 교수 모두 1999년 7월 대법원에 재상고하였다. 결과는 1999년 11월 대법원에서 양측에 기각 판결을 내려 교수가 A에게 5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유지되어 실질적으로 이 재판은 A의 승소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피해자를 향한 따가운 시선 "보복성 대응 아니야?'"
 소송이었지만 이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논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발생한 성희롱의 정도가 문제 삼을 만한 일인가? 그 정도의 행위는 친밀감의 표현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왜 피해 당시 문제제기하지 않았는가? 왜 해임 당한 후에야 제기했느냐 하는 것이다.
즉, 실제로 A가 성희롱을 당하지 않았는데도 해임에 대한 보복으로 전임 조교들이 당한 성희롱 사실을 듣고 자신도 당한 것처럼 위장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쟁점은 법정에서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크게 논란이 되었고 특히 '왜 성희롱 당시 문제 제기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은 이 사건을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연구와 실태조사에서 밝혀졌듯이 성희롱은 인간적 모욕감과 절망감으로 인해 일할 의욕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장애로 남는 경우도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더욱이 성희롱은 근무환경을 악화시켜 노동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인권 침해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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